Jan 19, 2009

인터넷상 익명성의 보호에 관한 미국 동향


회사나 개인들이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사람들이 쓴 댓글이나 블로그로 인해 신용이나 명예를 손상 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글쓴이의 신원을 알지 못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피해자들이 형사고소를 하면, 강제수사권을 가진 수사기관이 압수수색을 통해 익명의 글쓴이를 찾아내어 처벌이 가능하다. 한국과 달리[1] 미국에서는 명예훼손이 형사범죄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명예훼손 피해자는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밖에 없다। 강제 수사권이 없는 개인이 과연 익명의 글쓴이를 찾아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을까? 익명의 글쓴이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간단히 답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피해자는익명의 글쓴이를 ‘무명인(John Doe)’으로 표시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한다. 원고들은 흔히 웹사이트 운영자에게도 동시에 소송을 제기하지만, 미국Communication Decency Act(CDA)상의 쌍방향 컴퓨터 서비스 제공자( interactive computer service)에 해당하는 인터넷 회사는 제3자가 작성, 게시한 글에 대해서 민사상 책임이 면제된다।

2. 원고인 피해자는 discovery 절차를 이용해서 웹사이트 운영회사, 인터넷 접속 서비스 회사 등(이하 편의상 “인터넷회사”라고 한다)을 상대로 글쓴이의 가입자 정보 또는 IP주소를 제공하라는 요청을 한다.

3. 자료제공 요청을 받은 인터넷회사가 신상정보 제공 요청에 대해 불복하면, 법원이 강제로 인터넷회사에게 신상정보를 제공하도록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 원고는John Doe 소송제도와discovery 절차를 이용

한국법상으로 원고는 소장에 피고를 특정하여야 하고(민사소송법 제249조), 민사소송 절차에서 피고나 제3자에게 증거의 제출을 강제할 방법이 미약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원고가 글쓴이의 신원을 알지 못하면 피고를 무명인 즉 John Doe으로 표시해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증거조사 절차인 discovery 절차에서 인터넷 회사로 하여금 글쓴이의 신상자료를 제출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Discovery 절차에서 피고의 신원을 알아내면, 그 때 가서 피고 경정을 통하여 글쓴이를 상대로 소송을 계속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discovery 절차에서 자료제출을 요청받은 소송 상대방이나 제3자는 정당한 사유를 소명하여 자료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송 원인과 무관한 자료의 제공 요청, 과중한 부담을 주는 자료제공 요청, 보호 가치 있는 사생활에 관한 자료제공 요청, 변호사 자문 내용(attorney-client privilege) 의 제공 요청 등이 자료제출 거부 사유가 될 수 있다. 상대방이 자료제출을 거부하면, 종국에 가서는 법원이 거부 사유의 정당성 여부를 심사하여 법원의 명령으로 자료 제공을 강제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 법원은 글쓴이의 익명의 자유를 고려하여, 자료제출 강제 여부를 신중히 결정

미국에서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의 일부로서 익명으로 표현할 자유가 보장된다는 입장이 확고히 정립되어 있다. 익명의 자유에 관한 미국 대법원의 판시 내용 가운데 주요 부분을 짧게 인용해 보겠다.

"익명의 발행되는 팜플렛, 리플렛, 브로셔, 그리고 익명으로 출판되는 도서는 인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위대한 문학작품들은 종종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작품 창작자의 정체에 관해서 독자들은 궁금해 하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지지만, 일반적으로 창작자는 자신의 신원을 공개할 것인지 여부에 관한 자유로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법원은 경제적인 또는 공적인 보복에 대한 우려, 사회적 따돌림에 대한 염려, 또는 단순히 창작자의 사생활을 최대한 보호해 주려는 배려 등을 동기로 하여 익명성을 보호하는결정을 내리곤 한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지 간에 , 최소한 문학 저작물의 영역에 있어서, 익명의 저작물이 사상의 자유시장(marketplace of idea)으로 진입하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창작자 실명의 공개를 저작물의 공표를 허용하는 전제조건으로 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창작자의 익명으로 남기로 한 결정은, 공표하는 저작물의 내용에 어떤 내용을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결정이나 마찬가지로,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보호되는 표현의 자유의 일부이다." McIntyre v. Chic Elections Comm., 514 U.S. 341~42(1995)

익명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글쓴이의 신상정보 제출을 요청받은 웹사이트는 글쓴이가 가지는 익명의 자유를 근거로 discovery 요청에 대한 이의를 신청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원고가 가지는 discovery에 대한 권리와 익명의 자유라는 두 가지 상충되는 이익을 전반적으로 감안하여, 자료제출을 강제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현재 미국에서 어떤 경우에 신상정보를 제출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지에 관한 통일된 법적 기준은 없다. 하지만, 대체로 익명으로 표현할 자유 보호를 상당히 중시하여 원고로 하여금 청구원인과 discovery에 관한 이익을 충분히 소명하도록 하는 추세이다.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원고에게 높은 정도의 소명을 요구한 판결례

원고에게 높은 정도의 소명을 요구한 판결례들은 인터넷 회사로 하여금 게시물 작성자의 신상 정보를 제출하도록 강제하기에 앞서, 원고로 하여금 실질적이고 설득력 있는사실과 법률적 주장을 증거와 함께 제출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원고는 작성자가 한 표현의 내용, 원고가 입은 손해의 내용과 정도 등 각 법률요건을 피고의 summary judgment 신청을 기각하여야 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증거를 통해 소명하여야 한다. 다만 작성자의 신원, 작성자의 악의(malice)나 과실 등과 같은 작성자의 신상을 파악하여만 주장할 수 있는 사실들은 소명하지 않아도 된다. 대표적인 사건은 Delaware주 대법원이 결정한 Cahill v. Doe 사건이다. Doe v. Cahill, 884 A.2d 451 (Del. 2005) 사건의 사건 요약판결문 참조.

일부 법원은 앞서 말한 summary judgment 기준심사에 그치지 않고, 더나아가 그 다음 단계로 원고의 청구권 및 신상 공개의 필요성과 작성자가 가진 표현의 자유를 비교형량 한 후에, 원고가 가진 이익이 우월할 경우에만 자료제출을 강제하여야 한다는, 더 높은 기준을 적용하기도 한다. Dendrite International v. Doe, 775 A.2d 756 (N.J. App. Div. 2001)의 사건요약판결문; Mobilisa v. Doe, 170 P.3d 712 (Ariz. Ct. App. 2007)의 사건 요약판결문 참조.

  • 원고에게 낮은 정도의 소명만을 요구한 판결례

원고에게 낮은 소명만을 요구하는 판결례들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증거로서 뒷받침할 것까지 요구하지 않거나, 요구하더라도 낮은 정도의 소명만을 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다만, 그 낮은 정도의 소명이 어느 수준인지에 관해서는 법원마다 입장이 다르다. 원고의 주장이 선의(good faith)이고, 상대방을 괴롭힐 목적으로 소를 제기한 것이 아님을 소명하기만 충분하다고 하는 선의의 주장 기준[In re Subpoena Duces Tecum to America Online, 2000 WL 1210372 (Vir. Cir. Ct. Jan. 31, 2000) 사건요약판결문], 청구원인 요건사실을 빠짐없이 주장하기만 하면 된다는 취지의 소각하("motion to dismiss") 기준[Columbia Insurance v. Seescandy.com, 185 F.R.D. 573 (N.D. Cal. 1999) 판결문], 일응 타당한(prima facie) 주장을 하면 충분하다는 일응 타당성 기준 [Sony Music Entertainment v. Does 1-40, 326 F.Supp.2d 556 (S.D.N.Y. 2004) 사건요약판결문; Public Relations Society of America v. Road Runner High Speed Online, 799 N.Y.S. 2d 847 (N.Y. Sup. Ct. 2005) 사건요약판결문; Alvis Coatings v. John Does One through Ten, 2004 WL 2904405 (W.D.N.C. 2004) 사건요약판결문] 등이 낮은 정도의 소명만을 요구한 판결례에 속한다. 낮은 소명만 요구하는 판결례들도 실제 판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의 증거 제출을 요구하거나, 주장만이 아니라 증거에 의존해서 판단하기도 한다고 한다.

  • 결론

익명의 인터넷 이용자가 작성한 글에 의하여 손해를 입은 자는 미국법상 무명인, 즉 John Doe를 피고로 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한 후, discovery 절차를 통해 인터넷회사를 상대로 해서 작성자의 신원을 공개하도록 시도할 수 있다.

인터넷회사가 신원 공개 요청에 불복할 때, 언제 익명의 인터넷 이용자의 신상 공개가 강제되는지에 관한 미국내의 통일적 기준은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법원은 구체적인 사건에서, 원고가 주장하는 사실과 증거의 설득력, 원고가 입은 손해의 내용과 정도, 문제되는 표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기초로 원고와 피고의 이익을 모두 고려한 후에 신원공개의 강제 여부를 결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99년과 2000년에 선고된Columbia Insurance v. Seescandy.com 사건과 In re Subpoena Duces Tecum to America Online 사건에서는 거의 원고의 주장만에 근거하여 쉽게 신원 자료 공개를 강제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판결례들을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터넷상 익명성의 자유에 상당한 배려를 하여 원고에게 피고의 신원과 관련이 있는 사항을 제외한 요건들에 관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주장과 입증을 한 경우에 한하여 신원공개를 강제하는 추세라고 이해된다.

[1] 명예훼손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만 인정해 줄 것인가 아니면 형사상 처벌까지 가할 것인가는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 Article 19: Global Campaign For Free Expression이라는 단체에서 각 나라의 명예훼손에 관한 입법실태실제 처벌실태를 발표하였다. 이 자료를 보면,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형법을 가진 나라들을 많이 있지만, 대다수의 나라들이 실제로는 명예훼손을 처벌한 예가 2년 이상의 기간동안 전혀 없거나 4건 미만 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한국은no data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2005년 1월에서 2007년 8월까지 기간동안 5명 이상이 처벌받았음이 분명하다. 자료가 공개되었더라면 중국, 필리핀, 이란 등의 나라와 함께 ‘빨간색’으로 5명 이상 처벌한 국가로 표시될 뻔했다. 한국에 칠해졌어야 하는 빨간색의 의미는아마도 표현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나라라는 의미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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